[경찰일기 28] 장발의 순경, 당신을 추앙해요.
모범생으로만 살았던 나, 장발/염색에 대한 동경
나의 10대, 20대시절을 돌이켜보면 정말 무미건조했어.
[코리안 스탠다드 모범생] 이라는 단어로 딱 요약돼.
무단 지각, 결석 한번도 안하고 부모님, 선생님 말을 어기면 큰 일나는줄 알았고 반장도 몇번 해보고 어른들 말씀에는 토달지 않고 그저 Yes 맨이었으니까.
공부만 열심히 하면 인생 순탄대로 갈 줄 알았어. 그래서 이상한 대학교에 들어가면 인생 망하는 줄 알았어.
현역 때 미끄러져 별로 원하지 않던 대학교에 입학했지.
20살의 나는 그때 인생 망한 줄 알았어.
누가 딱히 시키지는 않았지만 고민없이 반수를 했어.
명문대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내 기준에서는 만족할만 한 대학교에 입학했지.
대학교 생활도 정말 모범생다웠지.
학점관리하고 스펙 쌓고 자격증 이것저것 따고 대외활동도 한 5~6개 했을거야.
그렇게 나는 개성없는 대학교 생활을 할 때,
머리를 샛노랗게 물들이고 긴 장발을 하며 풍류를 즐기는 자유로운 친구들이 내심 부러웠어.
대학시절 아니면 머리를 샛노랗게 염색하거나, 장발할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걸 알면서도 나에게는 그런 용기가 없었나봐. 정말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뼛속까지 모범생이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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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발의 순경, 당신을 추앙해요.
두달 전쯤이었나? 꽤 큰 행사가 있었어.
기동대 직원들로는 부족한가 싶었는지, 일선 지구대/파출소 직원들까지 지원을 온 꽤 큰 행사였어.
어떻게 아냐고? 기동대 직원들과 일선 지구대/파출소 직원들이 입는 근무복이 미묘하게 다르거든.
현직들만 아는 그런 디테일 이랄까?
뭐 아무튼 지정된 장소에서 어김없이 뻗치기(?) 근무를 하던 중 지구대/파출소에서 지원온 직원들이 우리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어.
꽤 멀리... 한 50m 거리에서도 장발이 눈에띄는 한 순경이 보였어.
한 두달 머리 커트를 하지 않아 덥수룩한게 아니라 그냥 진짜 장발이었어.
기동대 동료들은 난리가 났지.
"저 새끼 뭐냐?"
"와 장발 ㅅㅂ ㅋㅋㅋ"
"저 또라이 새끼 저거"
그 중 나이 좀 있는 팀장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시더라.
"와 저 또라이새끼 아니야? 순경 새끼가 겁도 없이, 아니 그냥 개념이 없네. 저거 내 밑으로 들어왔으면 완전 조져버리는데"
난 내심 장발의 순경이 부러웠어.
군대 다음으로 보수적인 직장이라 할만한 경찰이라는 직장에서 남자가 장발을 한다는게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봤어.
적어도 저 장발의 순경은 수많은 사람들이 Yes를 외칠 때, No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 아닐까?
그저 모범생, 그저 yes맨인 나의 관점에서는 저 순경은 자유롭고 주체적이고 자기 줏대가 확고한 사람이야.
내면적으로는 나의 롤모델이라 할 수 있지.
만약 내가 가까운 미래에 FIRE를 하게 된다면 하나의 버킷리스트가 추가됐어.
죽기 전에 장발 한번 해보려고.
그렇게 장발의 순경은 나를 지나쳐서 어디론가 가버렸어.
그리고 난 마음 속으로 말했어.
'장발의 순경, 당신을 추앙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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