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실의 도전기/경찰 일기 (2019.05 ~ ?)

[경찰일기 32] 박리(剝離)

Nomadic-Basil 2022. 10. 26. 23:29

 

 

나의 성격은 자유롭다. 

 

철저한 계획보다는 즉흥적이고 직감적인 것이 좋다.

 

누군가 나에게 명령하는 것보다 시행착오를 겪더라도 내가 스스로 경험해면서 깨우치는 것을 선호한다.

 

조언은 환영하지만 마치 자기말이 진리인것 마냥 훈계한는 꼰대질은 싫어한다.

 

MBTI로는 ENTP랑 INTP 그 사이 어딘가에 있다.

 

이런 성향의 내가 성향상 반대인 보수적이고 계급사회인 경찰이라는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으며

 

최근들어 나의 본래의 정체성이 점점 거세되고 점점 경찰화 되는 것 같다.

 

이런 저런 웃픈 에피소드가 있으며 다음과 같다.

 

 

 

 E.01 미용실

 

 

경찰은 계급사회이기에 보수적이고 군대문화가 있다지만 기동대는 의경문화 및 군대문화가 더욱 짙다.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특히 언어에서 그 차이가 크다.

 

나이차이가 많이 나면 '요'를 쓰는 것을 그닥 반기지 않는 듯 하다. 

 

물론 어떤 팀장/제대장을 만나는지에 따라 완전 케바케가 심하겠지만 

 

뭐든지 자기가 속한 곳이 가장 중요하지 않은가? 내가 속한 곳은 은연 중에 '다나까'를 쓰는 것이

 

디폴트 분위기다. 대부분 젊은 순경, 경장 직원들은 팀장급 이상에게 '다나까'를 쓴다.

 

누군가 강요는 하지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다들 쓰니까

 

모난 돌이 되기 싫어 나도 근 몇개월간 눈치껏 열심히 다나까를 썼다. 

 

그렇게 '다나까'를 계속 쓰다보니 미용실에서 헤어커트를 하러 갈때 나는 의식하지 못했지만 헤어디자이너 선생님이 이렇게 말했다. 

 

"아.. 고객님 군인 맞으시죠? 다나까 칼같이 쓰시는거 보니까 직업군인.. 맞죠?!" 

 

"네?.. 아.. 군인 아닙니다!(?) 아.. 아니에요 ^-^"

 

'네?.. 아 방금 나 계속 다나까 쓴거였어?.. 헐! 이제 무의식적으로 다나까 쓰네.. ㅠㅠ 왜 이렇게 짠하냐?..'

 

 

 

 

 E.02 건너편

 

 

기동대 월 실수령액은 매번 초과근무시간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보통 270~320 정도 나온다.

 

연금 기여금, 이것저것 세금 다떼고도 이렇게 나오는 것이다.

 

9급 말단 공무원,

 

그것도 호봉이 낮은 신임 순경이 월 실수령 300이 나오려면 그 말은 즉 초과근무시간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이다.

 

즉 워라밸 따위는 있기가 힘들고 거의 집-회사-집-회사 무한반복이다.

 

09~18시 근무하는 날은 흔치 않은 칼퇴하는 날이고

 

07~20시 근무가 상당히 많고... 시위가 격해지거나 길어지면 07~22시 근무하는 날도 종종 있다.

 

휴무날은 전날 야간근무를 했기에 휴일라기보다는 휴식에 가까운 날이다.

 

그냥 낮밤 바뀐거를 적응하며 잠만 자기에 바쁘다.

 

교대근무 특성상 친구들 만나기도 힘들고 대부분 얘기하는 사람이라고는 회사 사람밖에 없다.

 

그렇다보니 우리끼리 자연스럽게 일상 속에서 무전용어를 사용한다.

 

이런 상황속에서 얼마전에 대학교 동기를 만나는 과정에서 웃픈 에피소드가 있다.

 

"야! 바실아 니 어디야? 올리브영 앞이라며 나 지금 올리브영 앞인데?"

 

"아. 올리브영 XX(건너편의 무전용어)에 있어. 나 안보여?"

 

"뭐래 병신이 ㅋㅋㅋㅋ XX가 뭐야?"

 

"아 미안. 건너편 횡단보도 건너서 나 보이지?"

 

' 아 나 또 무의식적으로 무전용어 썼네..? ^-^; '

 

 

 

E.03 몰개성

 

 

회사에 출근하면 그냥 모두 남자다.

 

1층 2층 3층 4층 5층을 가도, 행정실에 가도, 운동장을 가도, 도서관을 가도

 

회사 건물 어디를 가도 남자밖에 없다.

 

이게 군대인지, 사회인지 가끔 헷갈릴때가 있다.

 

심지어 모두 같은 옷을 입고 있다.

 

신발마저도 모두 똑같다. 그 거무튀튀하고 못생긴 기동단화...

 

복제가 통일된 부서인 기동대이니 당연한 것인데,

 

가끔씩.. 어색하다. 나의 눈에는 여기 기동대는 개성을 거세당한 회사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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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에서 자유를 느끼며

 

 

회사에서 대중교통을 타고 퇴근할 때 중간에 홍대입구 주변을 지나간다

 

종종 오후 6시에 칼퇴할 때가 있는데 이럴 때는 집에 바로 가기는 좀 아쉽고,

 

교대근무 특성상, 그리고 퇴근시간이 불규칙한 부서 특성상 친구와 약속잡기도 힘들고

 

그냥 나홀로 집에 바로 가지 않고

홍대입구 주변에서 내려 홍대의 그 개성발랄하고 자유로운 분위기를 느낀다.

 

홍대입구역 9번 출구, 그곳으로 나오면 '이곳이 사회구나. 그래 난 이런 자유로운 느낌이 좋아'라고 느끼며 주변을 걸어다닌다.

 

분홍색으로 염색하고, 온몸에 타투를 하고, 최신 유행의 옷을 입고, 힙한 사람들을 보며

 

회사와 집만 오가는 나로서는 신선한 자유의 공기를 마시는 듯하다.

 

 

 

 

자유로운 홍대 주변을 걸어다닐 때, 

 

점점 무의식적으로 경찰화가 돼버린 나에게 경찰물을 빼내는... 박리하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직업이 한 사람의 정체성 중 대다수를 차지하게 된다면 그또한 슬픈 인생 아니겠는가?

 

 

 

 

 

 

홍대 주변을 걷다가 텐동집이 보여 고독한 미식가처럼 혼밥 조지고 집에 왔다.

 

아 내일은 09시 출근, 다음날 09시 퇴근인 24시간 당직근무가 있다.

 

끔찍하다.. 얼른 자야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