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실의 인생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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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실의 도전기/경찰 일기 (2019.05 ~ ?)

[경찰일기 38] 긁

Nomadic-Basil 2024. 10. 21. 02:12
피식대학 - 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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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렸을때부터 경찰이 꿈은 아니였다.
 
물론 경찰공무원 시험에 최종합격 후 중앙경찰학교에서 교육을 받으면서 마음가짐이 조금 달라지기는 했다.
 
의도가 어찌됐든 결국 경찰공무원이 됐고 나름 소신껏, 양심껏, 미약하게나마 사회의 선을 지향할 수 있는 회사에 합격했다는 것이 좋았고 누구에게 굽신거리면서 영업할 필요도 없고 그저 법에 근거해서 합리적으로, 그리고 합법적으로 해결하면 되는 직업이었으니까.
 
엄밀히 따지면 '경찰'이라는 회사라던지 '경찰공무원'이라는 직업에 대해서 크게 자부심이라던가 뽕(?)은 없다.
 
그저 '선을 지향하는 업무의 성격"에 대해서는 나름 자부심이 있다.
 
이런 가치관을 가진 나로서는 경찰을 욕하는 것은 별로 안긁히는데
 
내가 하는 업무에 대해서 부정당하거나 욕을 먹을 때 많이 긁힌다.
 
예를들면,
 
지구대에서 근무하면서 마주하는 공격적인 피혐의자 혹은 술에 취한 민원인들이 뱉는 말들에는 크게 긁히지 않는다.
 
대부분 경찰 조직에 대한 거시적인(?) 욕설들 뿐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전형적인 멘트들은 다음과 같다.
 
"야이 짭새새끼야"
"세금으로 월급받는 것들이 ~~ "
"무식한 경찰놈들"
"너네들이 그것밖에 안되니까 검찰한테 안되는거지"
 
이런 멘트를 들으면 대다수의 선후배 경찰관분들은 긁혀서 화를 내며 맞대응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반면에, 나로서는 별로 안긁힌다. 술취한 사람이 뭔 말을 못하겠냐? 라는 초연적인 마음가짐도 있고
 
내가 하는 업무가 부정당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내가 속한 회사에 대한 추상적인 비난일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에 엄청 긁힌 일이 있었다.
 
젊은 주취자 남성이 주변 사람들에게 횡설수설하면서 시비를 건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했다.
 
현장에서 폭행 등 별다른 범죄 혐의점은 없었기에 적당히 경고한뒤 집에 보낼 생각이었다.
 
주취자를 멈처세운뒤 말을 걸었다.
 
"선생님, 주변 사람들한테 왜 그렇게 시비거세요, 술에 취하셨으면 집에 들어가세요"
 
"집에 가라고? 당신, 소속과 계급이 뭐야?"
 
" X 지구대, 순경 XXX 입니다. 선생님 이제 그만하시고 집에 가세요"

 
" 순경?! 아 됐고, 순경은 저리 가. 더 윗 사람 데리고 와"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 극중 이사라가 경찰조사를 받던 중에 경찰공무원에게 "9급 공무원년은 꺼지세요"라고 했던 장면과 거의 흡사하다.
 
 

이사라: 9급 공무원 년은 꺼지세요 -더글로리 中-

 
 
경찰공무원으로 햇수로 4년차로 일하면서 내부인(선후배)한테 긁힌 일은 있을지언정 외부인(민원인, 피혐의자 등)에게 긁힌 적이 없던 강철멘탈인줄 알았던 내가 처음으로 제대로 긁혔다.
 
제대로 긁혀서 말이 나오지도 않는다. 말문이 턱 막힌다. 괜히 헛웃음은 나온다.
순경이라는 계급때문에 내가 하는 업무가 부정당한 느낌이다. 차라리 평범한 주취자처럼 술에 취한상태로 소리지르고 화를 냈다면 긁히지나 않았을텐데 마치 순경주제에 어디서 말 거냐는 듯한 그 가소롭다는 주취자의 냉소적인 표정이 잊혀지지 않는다. 
 
불현듯 예전에 실습생 시절에 어느 50대 주임분이 장난조로 말했던 얘기가 생각난다.
"바실아, 지금은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예전에는 순경은 회사에서 사람취급도 못받았어. 그니까 빨리 승진해. 그래야 내부인이나 외부인한테 무시 안당한다."
 
그래, 내가 하는 업무의 자부심이건 뭐건, 결국 나는 회사에서는 고작 "순경" 나부랭이 일 뿐이다.
 
계급도 최하위 말단인 순경나부랭이가 업무에 자부심을 느낄수는 없는 것이다.
 
업무에 대한 자부심은 계급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현실인 것이다.
 
그나마 경찰공무원으로 근무하면서 유일하게 남아있던 '일에 대한 자부심'이 사라져간다.
 
여기서 내가 선택할 사항은 2가지이다.
 
승진을 하던가, 아니면 계급사회에서 벗어나던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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