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9월, 하반기 인사가 시작되었다.
각 부서에서 보직공모가 쏟아지고, 나는 그 목록을 들여다보며 마치 네이버 부동산에서 마음에 쏙 드는 매물을 찾는 사람처럼 하나씩 눌러보았다.
주변에서는 다들 말한다.
“빡센 보직에서 1~2년만 미친듯이 굴러. 승진, 특진 보장해준다.”
이런 말을 듣고 출세욕 강한 동료들은 요직을 향해 나아간다.
하지만 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이야기였다. 승진, 출세는 내 인생의 우선순위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빡세게 굴려놓고 외부의 입김으로 인해 승진은 엉뚱한 사람이 하는 상황도 꽤 있다.
누군가의 장기말로 쓰여지며 팽당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지구대에서 계속 버티고 싶지도 않았다.
내 입으로 이런 얘기하기 쑥쓰럽지만,
나는 지구대에서 나름 “일 좀 하는 직원”이었다.
현장에서의 판단, 관련 매뉴얼, 내부시스템 다루는 것, 문서 만드는 것, 글 쓰는 것… 그런 것들이 몸에 익어 있었다.
종종 체포서 같은 서류를 참 세련되게 잘 쓴다고 칭찬을 종종 받는데, 블로그에 수백 개의 글을 써온 세월이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업무적으로도 도움이 된 것 같다.
지구대를 떠나고 싶었던 한 가지 이유는 바로 업무강도의 불균형이었다.
내가 있던 지구대는 50대 중후반의 경감·경위 선배들 비중이 컸다.
순찰차는 대부분 이런 분들과 매칭이 된다. 그분들은 사수, 나는 부사수
물론 어르신(?) 선배경찰이라고 해도, 수사경험이 있거나 열정이 있고 일적으로 배울 수 있는 배테랑 선배분도 계신다.
다만 내가 있었던 팀 어르신 선배분들은 수사경험은 없고 법리적으로 스마트한 분은 거의 없었다.
심지어 컴맹이 아닐까 의심이 되는, 디지털 리터러시가 거의 없는 어르신도 있었다.
일단 체포서 작성을 할 줄 모른다.
경찰관이 어떻게 체포과정을 문서로 담는 체포서 작성을 스스로 할 줄 모르는가?
아직까지도 이부분은 이해가 안된다.
아예 내부 시스템을 다룰 줄 모르고, PDF가 뭔지 파일 [확장자]에 대한 개념을 모르는 컴맹 어르신 경찰도 있었다.
물론 모를 수 있다. 그러면 배우면 된다. 그런데 대부분 배우려 하지 않는다. 이유는 단순했다.
“어차피 부사수가 다 해준다.”
피혐의자 및 피해자의 진술을 듣고, 대상자들에게 진술서를 작성하게 하고 압수를 하면 압수조서를 쓰고.. 등등 나 혼자서 바쁘게 일을 하는데 어르신 사수는 옆에서 도와주지도 않고 유튜브로 트로트 영상을 본다던지,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피해자 진술을 받으며 어떤 죄를 적용해야할지 등 법리적 판단에 고민이 생길 때, 도움을 청하기 위해 사수를 찾아가 물어봐도 돌아오는 답은 이거였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 형사과에 전화해서 물어봐.”
내 머릿속에서는 한 문장이 계속 맴돌았다.
“나는 과연 왜 여기서 이 고생을 하고 있는 걸까.”
절대적 빈곤은 견뎌도 상대적 빈곤을 못버티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듯이, 다같이 바쁜 것은 참아도 상대적으로 바쁜 것은 견디기 어려웠다.
그래서 인사이동을 신중하게 준비했다.
나는 명예도, 인정도, 출세도 필요 없었다.
그래서 나는 전략적으로 ‘한직(閑職)’을 노렸다.
회사에 꼭 있어야 하지만, 핵심은 아닌 자리.
성과 압박도, 회사의 관심도, 과한 책임도 없는 자리.
대신 승진의 길을 포기해야만 들어갈 수 있는 자리
대기업이었다면 좌천이라 불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공무원 생태계에서는 이야기가 다르다.
승진 욕심만 놓으면, 한직은 오히려 나에게 천국일지 모른다.
그렇게 회사에 존재는 하지만 다들 정확히 모르는, 조금 생소한 부서의 공고가 하나 올라왔다.
동료들에게 물어봐도 아는 사람이 없었고, 선배들도 “거기 뭐 하는 곳인지 나도 모르겠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직접 찾아봤다.
유튜브, 기사, 인터뷰, 공문까지 뒤져가며.
그리고 확신이 들었다.
아 ! 여기가 내가 찾던 곳이다.
하지만 인맥도 없고 빽도 없는 내가 이 부서에 지원하는게 의미가 있을까? 혹시 이미 내정자가 있고, 나는 그저 들러리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니까
그렇게 정공법으로, 지원서 및 자기소개서를 정성껏, 최선을 다해서 쓰기로 결심했다.
예전 취업준비생 시절에 작성했었던 케케묵은 자기소개서를 찾아서 나의 장단점, 지원동기같은 멘트를 해당 부서에 맞게 절실함을 담고, 챗GPT, 그록, 제미나이 등 인공지능으로 지원서를 다듬고, 나의 절실함과 최첨단(?) 기술을 활용해 지원서를 작성했다.
나의 간절함이 통한 것일까? 아니면 그저 운이 좋은 것일까?
빽도 없는 내가, 결국 우여곡절 끝에 그 부서에 발령을 받았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곳에서 일하고 있다.
조용히, 그리고 만족스럽게.
내 부서는 1인 근무다.
비유를 하자면 등대지기같이 혼자 근무를 하는 것이다.
이는 부서내 상사도 없고, 동료도 없는 것이다.
갈구는 사람도 없고, 터치하는 사람도 없다.
갑질과 회식은 당연히 존재할 수 없다.
누가 나를 감시하지도 않고, 불필요한 보고를 강요하지도 않는다.
해야 할 일만 깔끔히 끝내면 된다.
점심시간엔 팀장 눈치 보며 국밥을 억지로 먹을 필요도 없다.
오늘 점심은 내가 선택한다.
내가 먹고 싶은 메뉴로 말이다.
상사 자리에 수저를 정성스럽게 놓을 필요도 없다. 나 혼자 먹으니까
물론 한직은 출세의 길이 아니다.
부서에서 커리어를 쌓을 수도, 주특기를 만들 수도 없다.
승진 자리도 아니다.
하지만 나는 깨달았다.
모든 사람이 꼭 요직에 가야 할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또 나에게는 요직보다는 한직이 어울리는 것을
누군가는 조용한 자리에서
자신의 정신을 지키며, 건강을 지키며, 삶을 지키며 그렇게 행복하게 일할 권리도 있는 것이다.
남들이 외면하는 한직일지 몰라도
나는 행복한 한직을 찾았다.
언제까지 이 부서에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동안 직장에서 온갖 빌런들로부터 생긴 한(恨)을 한직(閑職)에서 풀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