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실의 인생 일기

[경찰일기 50] 선택적 권위와 얄팍한 침묵 본문

바실의 도전기/경찰 일기 (2019.05 ~ ?)

[경찰일기 50] 선택적 권위와 얄팍한 침묵

Nomadic-Basil 2026. 6. 14. 12:09

 
 
지구대에 근무하던 시절,
 
변호사 특채로 임용된 젊은 분이 우리 지구대로 실습을 왔던 적이 있다.
 
갓 임용된 젊은 신임 경찰관이었지만 계급은 무려 경감이었다.
 
사람마다 다르지만 순경 출신 경찰관이 경감까지 승진하려면 정말 빠르면 15년정도,
 
늦으면 25년정도가 걸린다.
 
과거 사법시험 시절에는 경감보다 한 단계 높은 경정으로 임용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는데,
 
로스쿨 제도가 도입되면서 한 단계 낮아진 모양이다.
 
그래도 비슷한 전문직인 회계사 특채가 경위로 시작하는 것에 비하면,
 
변호사는 조직 내에서 상당히 높은 대우를 받는 셈이다.
 
그런데 당시 내 이목을 끈 것은 그 엘리트 신입 경감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를 마주할 노주임의 반응이 궁금했다.
 
그분은 퇴직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경위였다.
 
보통 그 정도 연차라면 경감 계급장을 달고도 남았을 시기였지만,
 
과거 중징계를 받은 이력이 있어 승진길이 막혔다고 들었다.
 
그분은 유독 "고참"이라는 단어를 입에 달고 살았다.
 
자기보다 후배인 팀장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후배들이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늘 비슷한 말을 뱉었다.
 
"요즘 애들은 고참 알기를 우습게 안다니까"
 
조직에는 늘 본받고 싶은 선배도 많지만, 반대로 씁쓸한 뒷모습을 보여주는 유형도 존재한다.
 
그는 후자였다. 젊은 남경들에게는 유독 엄격하고, 반대로 젊은 여경들에게는 한없이 부드러웠다.
 
게다가 같은 경위 계급이라도 자신보다 젊으면 은근히 텃세를 부렸다.
 
같은 경위임에도 사소한 일에 잔소리를 얹고, 괜히 기를 죽이려 들었다.
 
마치 "계급은 같아도 내가 선배"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확인받고 싶어 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40대 초중반의 다른 주임님들과 순찰차를 타면 자연스럽게 그분의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저 양반 중징계 때문에 승진 못한 게 한이 돼서 저러시는 거야."
 
"열등감 때문에 젊은 경위들 괜히 건드리는 거지, 바실아 징계받을 짓 하지마라 저렇게 된다."
 
남의 속마음을 완전히 꿰뚫어 볼 수는 없지만,
 
나 역시 그 의견에 내심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래서 더 궁금했다.
 
과연 그분은 변호사 특채 출신의 젊은 신입 경감에게도 똑같이 행동할까?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꽤 충격적이었다.
 
그분은 어색한 인사만 나눴을 뿐,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일장연설을 늘어놓았을 법한 상황인데도 철저히 침묵했다.
 
오히려 상대의 눈치를 보며 불편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벽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 순간 문득 의문이 들었다. 평소 그분이 그토록 강조하던 가치는 정말 '고참의 권위'였을까.
 
만약 그가 진심으로 선후배의 질서와 고참 문화를 중요하게 생각했다면,
 
상대가 누구든 자신의 신념대로 행동했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자신보다 어린 경위에게는 연차를 내세우며 압박했고,
 
자신보다 어린 신입 경감 그것도 변호사 출신의 강자 앞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며 깨달았다. 사람은 생각보다 권위 그 자체를 추구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보다 약한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의 맛'을 좋아할 뿐이다.
 
진짜 권위는 강한 사람 앞에서도 일관돼야 한다.
 
상대의 배경에 따라 태도가 변한다면 그것은 신념이 아니라 계산이고, 얄팍한 눈치다.
 
물론 사람에게 급이 있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
 
변호사 출신이라고 해서 우월하고, 순경출신이라고 해서 열등할 리 없다.
 
하지만 그날 나는 인간의 얄팍한 속성을 분명히 목격했다.
 
평소 "고참"을 외치던 사람조차, 자신이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강력한 배경 앞에서는 침묵한다는 사실 말이다.
 
어쩌면 그가 지키고 싶었던 것은 고참의 명예가 아니라, '만만한 이들 위에 서 있다'는 권력감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날 나는 계급이나 학벌, 경력보다 더 무서운 인간의 민낯을 보았다.
 
열등감을 감추기 위해 급조한 권위는 이토록 쉽게 무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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